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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빠, 한 곡 뽑으세요~"

흥 많은 우리 민족에게 노래가 빠질 수 없다.     다가오는 가정의 달에는 부모님의 애창곡을 '직관'하며 박수갈채를 보내고, 그동안 갈고닦은 노래 실력을 뽐내기도 하고, 가족 전체가 '떼창'을 부르며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시간을 보내보면 어떨까?   꼭 노래방에 갈 필요도 없다. 'SK1000N 블루투스 스피커 듀얼 마이크' 하나만 장만해두면 우리 집이 곧 프리미엄 노래방이 된다.   SK1000N 블루투스 스피커 듀얼 마이크는 가정용 노래방 기기 시장에서 이미 유명한 제품이다. 고출력의 선명하고 실감 나는 사운드와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 고해상도 음장/음향 효과에 에코 조절, 총 5가지 음성 변조 기능까지 갖추고 있다.     거기다 뛰어난 휴대성을 자랑해 집뿐만 아니라 각종 모임이나 파티, 캠핑장 등에서도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활동을 즐길 수 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노래할 수 있는 듀얼 마이크 시스템을 통해 부모님의 '듀엣곡'을 들어볼 수 있는 것도 특장점이다.     내구성과 디자인 면에서도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것이 없다. 세련된 디자인은 인테리어 소품으로도 손색이 없으며 어느 공간에도 자연스레 어우러진다. 연결도 쉽고 빠르게 가능하여 누구나 어렵지 않게 사용이 가능하다. 해당 제품은 무선 연결을 통해 다양한 디바이스와 호환한 후 사용하면 된다.   현재 중앙일보 '핫딜'에서 마더스데이를 맞아 20달러 할인된 149.99달러에 만나볼 수 있다. 음악의 힘으로 부모님께 새로운 취미와 즐거움, 행복을 전해드릴 수 있는 최고의 효도선물이 될 전망이다.     ▶문의:(213)368-2611 ▶상품 살펴보기: hotdeal.koreadaily.com 핫딜 엄마 아빠 엄마 아빠

2024-04-28

[수필] ‘김샛다’

내 외동딸 라영이는 1982년 5월생이다. 나는 8남매의 불우한 가정에서, 아내는 6남매의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기에 우리는 한명만 낳아서 잘 기르기로 이미 결혼 전에 약속한 터였다.     아내가 출산 기미가 있어 화곡동 단골 산부인과에 입원했다. 나는 퇴근 후 곧장 병원으로 갔다. 어머니와 장모님이 나보다 먼저 병원에 와 계셨다. 우리는 단산을 결정했기에 성별 검사를 하지 않아서 궁금했으나 내심으로는 은근히 아들을 기대하고 있었다. 아내가 서너번 유산한 경험이 있어 초조해서 병원 출입문 입구에서 줄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중학교 동창 2명이 격려차 방문해 주었다.     산고로 고통을 호소하는 아내의 비명을 들을 때마다 복도 의자에 앉아 있는 나는 가슴에 비수가 날아들어 후벼 파는 것처럼 아팠다. 아이 낳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인지 미처 몰랐다. 우리 어머니는 그렇게 힘든 출산을 어떻게 여덟번이나 하셨을까? 새삼 어머니의 노고와 은혜에 고마움을 느꼈다.     새벽 2시가 거의 다 되어갈 때 간호사가 병실로 호출하여 들어갔더니 “예쁜 공주님이 탄생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부인은 회복실에 계십니다”라고 알려 주었다. 회복실에 들어가 아내의 손을 잡고 “수고했다”고 위로했다. 어머니는 “우리 집안에는 쓰잘머리 없는 것만 자꾸 나온다”며 노여워하셨고 장모님은 마치 죄인이라도 된 양 “죄송하다.”며 어머니께 곰비임비 조아리고 계셨다.     회복실을 나오니 그때까지도 같이 기다려 주었던 친구들이 “아들이냐?” 묻길래 나도 모르게 ‘김샛다’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 눈치 빠른 녀석이 “첫 딸은 살림 밑천이라는데… 잘 됐다”고 위로하였다. 그 이후로 친구들은 나를 볼 때마다 “김샛다. 아빠! 김샛다는 잘 자라고 있는가?”라며 빈정대는 것이 인사였다.     퇴원 후 아내의 몸보신을 위해 우시장에 가 돼지 족을 사 왔다. 그 당시는 가난하게 살 때여서 소 족을 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소 족을 고아서 우려 먹여야 원기를 회복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무능했던 남편이었던 것이 지금까지도 가슴 저리다.   나의 ‘김샛다’는 잘 자라 주었다. 두 살 때 연탄가스 중독으로 새벽에 기절하여 혼비백산한 내가 안고 병원으로 달음질치던 중 의식이 깨어난 것 이외는 속 썩이거나 걱정시키는 일은 하지 않은 것이 고맙기만 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을 가고 싶어 해 옥스퍼드에 있는 사립여고에 입학시키고 돌아오는 기내에서 얼마나 훌쩍거렸는지 옆 승객들한테 핀잔까지 받았다. 저 어린 것이 엄마, 아빠를 얼마나 그리워하게 될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린애를 물가에 놔두고 온 부모 마음 이해할 만했다.     ‘김샛다’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거의 10년간 공부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군의관과 결혼했고 자신은 영어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나에겐 귀하기만 한 손자까지 한 명 안겨주었다. 사위가 “애 엄마가 자식을 한명만 더 낳자고 졸라대도 거절하니 아버님이 압력 좀 넣어 달라”고 부탁하기에 내 손자가 외로워서 안 좋으니 한명 더 낳으라고 권유했더니 “아빠도 한명만 낳고 왜 더 낳으라고 하냐”고 반문했다.   나에게는 ‘김샛다’가 아니라 복덩이가 태어난 것이었다. 딸자식이 태어난 이후로 직장에서는 승승장구했고 아내가 부업으로 손댄 요식업이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아가는 듯 금상첨화가 되어 부를 쌓게 되었다. 애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드레스를 입히고 예쁜 모자를 씌워 나들이 데리고 나가면 지나치던 사람들이 모두 뒤돌아보며 단란한 가족이라며 부러워하기도 했다.   내가 젊었던 시절에는 남아선호 사상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지만 지금은 딸을 더 선호하는 추세다. 주위를 둘러보면 아들보다는 딸이 부모에게 더 효도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딸 둘이면 금메달, 아들 둘이면 목메달’ 이란 우스개도 있다. 나는 ‘김샛다’가 효도해 주길 바라지는 않는다. 그 가족이 건강하고 화목하게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효도이다.   나는 노후 대책은 내가 책임지고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기고 있다. 이진용 / 수필가수필 우리 어머니 병원 출입문 엄마 아빠

2023-10-19

[삶의 뜨락에서] 참으로 희귀한 체험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책상머리에 앉았습니다. 아직도 어리바리 합니다. 이 나이에 어리바리 하지 않으려고 한동안 용기를 내어 이것저것 분주를 떨었습니다. 처음으로 Christmas Caroling에 끼어들어 이틀간을 노장 댁만을 골라가며 우리 합창단원과 신나게 성탄 노래를 불러드렸습니다. 참으로 신나고 보람도 있었습니다.   이 나이에 춥고도 힘들었는지 다음 날  절대로 안 걸린다고 건방을 떨었던 코로나19가 맛 좀 보라는 듯 살짝 찾아 왔더랍니다. 그래서 살짝 남편에게도 옮겼습니다. 바다 건너에서 Holiday 지내러 막 도착한 큰아이도 5~6일 후 덜컥 걸리고 말았습니다. 방 두 개밖에 없는 집에 환자가 세 사람이 됐습니다. 14시간 멀리 사는 아들, 며느리, 식구들이  함께 못함에 섭섭했던 마음이 다행으로 바뀌게 됐던 순간이었습니다.   멀리서 온 큰아이에게는 제발 옮기지 말아 달라고 진심으로 빌었습니다. 한 방에 두 환자가 갇혀 있는 지경에 돌연 큰 아이가 나도 양성이라고 방문을 박차고 들어옵니다. 갑자기, 이제 우리 모두 함께 지낼 수 있다고 해방을 외칩니다. 이 아둔한 엄마는 그저 내 기도가 망가짐에 통곡이 터져버렸습니다. 한참 울다 생각하니 아무 데도 쓰잘 것 없는 울음이었습니다. 세 식구가 힘을 합하고 나니 회복도 빠른 듯 자유스러웠습니다. 그리하여 저희 세 식구는 성탄절과 새해 아침을 거룩하고 고요한 밤으로, 병 침상에서 지나게 된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지내보는 희귀한 명절이었습니다.     명절은 다 지나갔지만 저 꼭대기(버몬트주)에 사는 그리운 막내, 언니에겐 일 년에 한 번이지만 동생이 보고파 새벽부터 짐을 꾸려 차에 싣고 떠날 준비를 끝냈습니다. 확인차 저희는 테스트를 다시 실행했습니다. 악! 큰 아이에게 두 개의  빨간 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언니는 실망을 끌어안고 스스로 조용히 방에 들어가 문을 잠급니다. 어이가 없어 이 엄마는 눈물도 콧물도 감춘 채 멍하니 침묵을 지켰습니다.     말문이 막힌 썰렁한 방에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있는데 갑자기 Sun room에 내가 사랑하는 화초들 생각이 떠오릅니다, 며칠간 강추위를 감당하고 이 엄마는 전염병에 누웠고 큰 아이는 부모 세 끼 해먹이느라  화초까지 보살필 틈새도 생각도 궁핍했었나 봅니다. 갑자기 내려간 온도에 화초도 얼어버렸습니다, 이게 다 무슨 일인지요? 코로나와 싸우느라 화초는 잊어버렸더랍니다. 함께 살아왔던 자식과도 같은 화초가 추위에 떨며 이 엄마를 기다렸을 생각을 하니 참으로 미안했습니다. 부디 살아달라 사정하고 있습니다. 마을 노인들이 사랑하며 키우고 있는 강아지 대신 저는 식물, 꽃을 키웁니다. 저에게는 저 아이들의 죽음이 모두 제 책임인 듯 마음이 아픕니다. 생명이 있는 무엇이든 영원할 수는 없지만 코로나에 나이까지 들어 기억력 저하증으로 오는 제 무책임과 무관심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도 어수선한 데다 이 전염병은 언제나 우리를 떠나려는지 도무지 평화를 찾을 수 없습니다. 요즘 또 한참 퍼져나가는 낌새입니다. 나 같은 조무래기 인간이 아우성을 친들 소용도 없고 효과도 없는 줄 알면서도 불평을 늘어놓아 봅니다. 우두커니 앉아 다시 살듯 말 듯 한 화초들을 바라봅니다. 날씨도 우중충, 같은 땅에 있으며 동생조차 만나지도 못하고 병치레만 하다가 제집으로 돌아간 큰 아이도 자꾸 제 눈에 밟힙니다. 그래도 엄마 아빠를 보살펴 드릴 수 있었던 4주간이 행복했다는 큰딸 아이의 참사랑이 이 엄마, 아빠 가슴에 깊이 사무치는 만감을 심어 주었습니다.   희귀한 체험과 경험에서도 느끼고 배우게 하는 교훈과 깊은 사랑을 맛볼 수 있는 귀하고 귀한 삶의 한 달이 또 흘러가고 있습니다.   제 글을 읽어 주시는 여러분들,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고 새해에 더욱 행복하십시오!! 남순자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희귀 체험 화초들 생각 엄마 아빠 성탄절과 새해

2023-01-30

[글마당] 한 물건에 집착하는 아이와 나

나는 집에서 다운 조끼를 입고 있다가 더우면 벗어서 의자에 깔고 앉는다. 방을 옮길 때도 끼고 다닌다. 잠자리에도 조끼를 앞으로 입고 껴안고 잔다.     지난밤 자다가 몸이 으스스했다. 내 가슴에 조끼가 없다. ‘그냥 자자’며 나를 다독였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일어났다. 다운 조끼를 찾아서 앞에 걸치고 부드러운 촉감을 만지다가 옛 생각에 빠졌다.     작은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부드러운 하늘색 담요를 항상 끼고 놀았다. 어딜 가든 그 담요를 질질 끌고 나가려고 했다. 담요는 색이 바래고 낡아졌다. 아무리 유사한 새것을 줘도 막무가내였다. 감추고 주고를 반복하다가 촉감이 같은 갈색 곰 인형을 사줬다. 한동안은 그 담요를 찾다가 포기했는지 곰 인형을 끼고 조용해졌다.     곰 인형도 낡고 더러워졌다. 삐져나온 속살 꿰매기를 서너 번. 더는 수리가 불가능해져 벽장 속에 감췄다. 아이는 찾고 나는 주기를 반복하다가 쓰레기통에 버렸다. 몇 날 며칠 쓰레기통을 뒤지며 곰 인형을 찾는 아이를 보며 무척 후회했다.     그 이후 곰 인형 대신인지 아이는 겨드랑이의 보드라운 살을 수시로 만졌다.     “또 만져. 너 혹시 겨드랑이 만지작거리는 것이 엄마가 곰 인형을 버려서니?”     “형이 하도 난리 쳐서 엄마가 형에게만 집중했잖아요. 그래서 나는 엄마를 힘들게 하지 않으려고 곰 인형하고 조용히 있었어요.”     “저런 미안해라. 곰이 너무 낡아서 위생상 안 좋아서 버렸어. 엄마 아빠는 너를 형과 똑같이 사랑했잖아?”     “네 알아요.”   아이의 말이 맞다. 큰아이는 수시로 먹겠다고 울며 내 곁을 떠나지 않아 키울 때 무척 힘들었다.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말라서 움푹 팬 내 쇄골도 잡고 매달렸다. 계속 뛰고 달리는 아이가 다칠까 봐 온 정신은 큰아이에게 있었다.     작은아이는 배 안에서 발길질도 하지 않고 얌전하더니 태어나서도 보채지 않았다. 아이가 보챈 것은 담요와 곰 인형을 감추고 주지 않았을 때뿐이다. 아이는 자라면서 소리 없이 움직이며 애교 섞인 유머로 집안 식구를 웃긴다.     “엄마는 네가 화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어떻게 사람이 화를 내지 않을 수 있니?”     “엄마, 화를 내서 돈이 생겨요? 쓸데없이 왜 화를 내요.”     무언의 반항인가?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로 곰 인형 사줄게. 엄마를 용서해라.”     “아니에요. 이젠 괜찮아요. 나이키(프렌치 불도그)가 있잖아요. 나이키는 예전에 내 곰을 닮았어요. 정말 사랑스러워요. 나는 나이키만 있으면 돼요.”   내가 다운 조끼를 입고 매만지며 자듯이 아이도 나이키를 배 위에 올려놓고 살살 만지면서 잔다. 그때 내가 왜 아이의 소중한 담요와 곰 인형을 버렸을까? 후회한다. 아이에게 너무 미안해 잠을 설쳤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물건 집착 다운 조끼 엄마 아빠 하늘색 담요

2022-12-16

[삶의 뜨락에서] “Zoom 으로 만납니다.”

지구 여기저기에 흐트러져 사는 저희 식구입니다. 펜데믹 덕분인지 대충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길어지니 아이들이 많이 보고 싶습니다.   이 엄마, 아빠가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뒷전에 아이들에게도 어떤 변화가 보이는 모습과 느낌에 선 듯 제 가슴이 움츠려집니다. 무엇에 움츠림인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아이들에겐 제 생각이나 느낌과는 전혀 다른 현실에 돌진하는 그 모습이 이 엄마 마음에 어딘가 아주 힘들어보여서일까요? 생각해 보면 우리도 그렇게 살았지요! 이제 우리에겐 그때를 잊으라 하는 하늘의 명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늙었단 말이 싫지요! 실제로 기억력이 급속도로 감소하는 나 자신을 확연하게 느끼면서도 겸손하게 받아드려야 한다고 조용히 저 스스로 타이르곤 합니다.   일요일 오전 여덟시 Zoom 문이 열렸습니다. 하나는 저녁 시간, 저기는 아침 시간, 바다 건너는 잘 시간, 온통 다르고 피곤해 보이는 아이들과의 만남입니다. 큰아이가 오늘 모임에 숙제를 냈습니다. “각자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가족여행…? 을 회고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추억을 짜내느라 밤잠을 설칩니다. 제 머리에는 온갖 것이 스쳐 갔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뜨니 흐릿한 영상만이 아물거립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족히 가족휴가란 것이 뚜렷하게 있었던가?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래도 엄마로서 숙제는 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으로 한 가지 찾아낸 것이 북쪽으로 올라가 페리를 타고 건넜던 섬(Block Island)으로 돌아가 보았습니다.   다섯살 터울로 태어난 성격도 가지각색인 세 아이에 속마음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던 기억 속에서 ‘두려웠다, 맛있었다’를  골라보았습니다.   블랙베리 넝쿨 속에 차를 몰고 들어가 실컷 따먹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공포 속에 좁다란 가시넝쿨 사이를 뚫고 길을 찾아 나가야 했습니다. 우리 자가용에는 온통 그럴싸한 무늬를 그려가며 힘겹게 탈출했던 탐험대였습니다. 덕분에 저녁 식사는 랍스터로, 마음 졸였던 가슴을 달래기로 했습니다.   뒤뜰 큼직한 냄비 속에 랍스터 다섯 마리, 그 위에 껍질을 반쯤만 벗긴 옥수수 5개를 올리고 맥주 두 깡통을 뿌리곤 장작불을 지폈습니다. 순서를 제 머리에 얌전히 넣었습니다. 가족이 참으로 맛있게 먹었던 랍스터  요리였습니다. 집에 돌아와 실습도 했습니다. 아들과 아빠는 발버둥 치는 바닷가재를 다루느라 열중! 어린 막내는 살아있는 랍스터를 잡아먹는다고 통곡, NYU 영화과 일년생 큰 아이는 작품 찍기에 바쁩니다. 그리하여 현장 다큐멘터리 필! 큰아이의 작품이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이 레시피는 귀한 손님이나 때로는 아이들을 먹이고 싶을 때 가장 쉽고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그래서 생색을 내는, 식당보다 저렴하고 손쉽게 주목을 받는 제 특선 밥상이 됐습니다.     나이가 층지는 아이들을 데리고 휴가를 간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보니 그런대로 얻은 것이 있었고 배운 것도 많았다고 추억이 말해줍니다. 후회보다는 짧은 여행이라도 어떤 추억거리가 될 수 있고 어떤 점에서라도 삶에 에너지 보탬이 되었고 그 경험에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배움의 터가 거기에 있었다고 아이들에게 말해 주고 싶었습니다. 남순자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zoom 저녁 시간 엄마 아빠 엄마 마음

2022-09-13

[이 아침에] ‘치카를 찾아서’

‘치카를 찾아서’는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쓴 미치 앨봄의 메모아다.  2010년 아이티( Haiti) 대지진 때 엄마는 죽고 고아가 된 치카는 3살이 되었을 때,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 프랭스에서  미치 앨봄이 운영하기 시작한 보육원의 가족이 된다.  그러나 그 보육원을 생기로 가득 채웠던  활달한 치카가 다섯살이 되었을 때 희귀종 뇌종양(DIPG)진단을 받는다. 어린아이에게만 생기는 뇌암으로 생존율이 제로이며 아이티에선 치료조차 어려운 희소 암이다. 결국 미치와 아내 재닌은 치카를 미국 미시간 집으로 데려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온갖 치료를 시작한다.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상태에서 미시간의 모트 어린이병원을 기점으로 시작된 21개월의 투병생활. 뉴욕의 슬론 캐터링 병원을 비롯해 소아 뇌종양(DIPG)전문의를 찾아 독일까지 세번이나 오가며 자가면역세포 주입치료까지 받는다.  그 모든 치료에도 불구하고 한쪽 다리가 약해져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왼쪽 눈이 감기지 않고 한쪽 입꼬리가 내려앉는 상황이 반복된다. 결국에는 휠체어에 앉아 고개도 가누지 못하고 말도 못하게 된 상태에서 위에 튜브를 연결하여 영양을 공급받다가 7살 생일을 마지막으로 보낸다.   내가 이책을 계속 읽지 못하고 책을 잠시 접게 했었던 부분은 치카의 눈에 붙인 하얀 테이프 대목이었다. 눈이 감기지 않아 안구 건조를 막기 위해 테이프를 붙여 잠을 재우며 그 애처로움에 미치가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울부짖곤 했던 장면이다.   우리는 때로 이처럼 이해할 수도, 감당하기도  힘든 삶을 목격한다. 오래전 내가 다니던 교회의 젊은 유학생 부부에게 생겼던 일이다. 갓 태어난 아기의 심장 판막이 제대로 닫히지 않아 손바닥만 한 붉은 핏덩이에 주삿바늘들이 꽂힌 채 인큐베이터 안에서 시작된 삶. 7일 후에 바늘들은 뽑혔으나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마지막으로 부모의 품에 안겨 떠나보내야 하는 순간을 맞게 된다. 아빠는 그 상황을 감당하지 못해 아기를 받아 안지 못하고 엄마가 흐느끼며 아이를 품에 안았다. 후회되지 않게 아빠도 마지막으로 품 안에서 보내주라는 주변의 권유로 마침내 아빠가 아기를 받아 안았고 곧 아기는 그의 품 안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죽어갔던 아픈 기억이다.     5살의 어린 몸으로 치열한 고통을 견뎌내며 미치에게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 묻던 치카의 삶과 며칠간의 인큐베이터 삶을 맞으려 9개월간 엄마의 뱃속에서 기다렸던 신생아의 두 삶을 감히 헤아려 본다.     결국 우리는 모두 죽음을 향해 부단히 달려가는 경기자들 같다. 누구도 거슬러 되돌아가지 못하고 계속 달려야 하는 일방통행의 길. 치카는 7년의 삶 속에서 혈육을 초월한 사랑을 남기고 달린 장한 선수였고, 신생아는 7일간의  짧은 경기를 달려 엄마 아빠에게 사랑의 씨를 심어주고 갔다. 70대 후반을 바라보는 나는 어떤 의미와 어떤 여운을 남기며 마지막 남은 삶의 여정을 달려가야 할까. 김찬옥 / 수필가이 아침에 엄마 아빠 자가면역세포 주입치료 희귀종 뇌종양

2022-08-23

[이 아침에] ‘치카를 찾아서’

‘치카를 찾아서’는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쓴 미치 앨봄의 메모아다.  2010년 아이티( Haiti) 대지진 때 엄마는 죽고 고아가 된 치카는 3살이 되었을 때,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 프랭스에서  미치 앨봄이 운영하기 시작한 보육원의 가족이 된다.  그러나 그 보육원을 생기로 가득 채웠던  활달한 치카가 다섯살이 되었을 때 희귀종 뇌종양(DIPG)진단을 받는다. 어린아이에게만  생기는 뇌암으로 생존율이 제로이며 아이티에선 치료조차 어려운 희소 암이다. 결국 미치와 아내 재닌은 치카를 미국 미시간 집으로 데려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온갖 치료를 시작한다.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상태에서 미시간의 모트 어린이병원을 기점으로 시작된 21개월의 투병생활. 뉴욕의 슬론 캐터링 병원을 비롯해  소아 뇌종양(DIPG)전문의를 찾아 독일까지  세번이나 오가며 자가면역세포 주입치료까지 받는다.  그 모든 치료에도 불구하고 한쪽 다리가 약해져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왼쪽 눈이 감기지 않고 한쪽 입꼬리가 내려앉는 상황이 반복된다. 결국에는 휠체어에 앉아 고개도 가누지  못하고 말도 못하게 된 상태에서 위에 튜브를 연결하여 영양을 공급받다가 7살 생일을 마지막으로 보낸다.   내가 이책을 계속 읽지 못하고 책을 잠시 접게 했었던 부분은 치카의 눈에 붙인 하얀 테이프 대목이었다. 눈이 감기지 않아 안구 건조를 막기 위해 테이프를 붙여 잠을 재우며 그 애처로 움에 미치가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울부짖곤 했던 장면이다.   우리는 때로 이처럼 이해할 수도, 감당하기도  힘든 삶을 목격한다. 오래전 내가 다니던 교회의 젊은 유학생 부부에게 생겼던 일이다. 갓 태어난 아기의 심장 판막이 제대로 닫히지 않아 손바닥만 한 붉은 핏덩이에 주삿바늘들이 꽂힌 채 인큐베이터 안에서 시작된 삶. 7일 후에 바늘들은 뽑혔으나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마지막으로 부모의 품에 안겨 떠나보내야 하는 순간을 맞게 된다. 아빠는 그 상황을 감당하지 못해 아기를 받아 안지 못하고 엄마가 흐느끼며 아이를 품에 안았다. 후회되지 않게 아빠도 마지막으로 품 안에서 보내주라는 주변의 권유로 마침내 아빠가 아기를 받아 안았고 곧 아기는 그의 품 안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죽어갔던 아픈 기억이다.     5살의 어린 몸으로 치열한 고통을 견뎌내며 미치에게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 묻던 치카의 삶과  며칠간의 인큐베이터 삶을 맞으려 9개월간 엄마의 뱃속에서 기다렸던 신생아의 두 삶을 감히 헤아려 본다.     결국 우리는 모두 죽음을 향해 부단히 달려가는 경기자들 같다. 누구도 거슬러 되돌아가지 못하고 계속 달려야 하는 일방통행의 길. 치카는 7년의 삶 속에서 혈육을 초월한 사랑을 남기고 달린 장한 선수였고, 신생아는 7일간의  짧은 경기를 달려 엄마 아빠에게 사랑의 씨를 심어주고 갔다.  70대 후반을 바라보는 나는 어떤 의미와 어떤 여운을 남기며 마지막 남은 삶의 여정을 달려가야 할까.  김찬옥 / 수필가이 아침에 엄마 아빠 자가면역세포 주입치료 희귀종 뇌종양

2022-08-21

[수필] 나는 누구였나

꿈자리가 뒤숭숭하다는 표현을 어릴 적 할머니와 살 때 자주 들었다. 짧지 않은 내 삶에서 꿈에 의해 감정이 이리저리 흔들린 기억, 1도 없다.     세상 떠난 가족이 꿈에 나타나면 어쩌니저쩌니 하는 점쟁이의 말을 깡그리 무시하며 살아왔다.     부정적으로 좋지 않다는 해석을 믿지 않고 내가 긍정적으로 좋게 해석을 한다. 어쩌다 한 번 보이는 모습들이니 소중하게 받아들이는 거다.   행여 엄마라도 날 찾아온다면 그날은 로또 당첨되는 날. 보고 싶은 얼굴 보았으니 신나서 좋은 하루 꾸밀 수 있다. 묻고 싶은 얘기를 깜빡 잊고 또 그냥 엄마와 헤어진 것이 아쉽다.     다음엔 꼭 알아봐야지. 그렇게 수시로 한 사람씩 내 꿈에 출현했던 친정 식구들이 돌아가는 새벽이면 그날 하루를 행복하게 허락받은 기대감으로 부풀곤 한다.   삼복더위에 세상 구경 시작한 지 몇몇 해. 올해 생일엔 예년과 다르게 뼈가 시리다. 여섯 살 터울로 서먹하게 지내던 작은 오빠와 이별한 지, 두 해하고도 7개월이 지났는데 이제야 움츠린 내 모습이 서럽다. 오도카니 혼자 남은 걸 왜 보는가. 몇 날 며칠을 밤마다 이어지던 엄마, 아빠, 큰오빠, 작은오빠. 그리운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내가 깨달아야 함은 무엇이었나.     아하, 내가 혼자구나. 든든한 내 친정 밀양 박씨 집안의 마지막을 가늘게 붙들고 있는 내 아버지의 막내, 내가 있음을 깨우치려는 식구들의 아우성이었다. 기제야, 왜 넌 노기제라 하니? 박씨 집안의 딸인데 박기제여야지. 기제야, 아빠가 네게 준 성은 박씨임을 기억해라. 어서 박기제로 돌아오거라. 내 소중한 딸임을 망각하지 말거라.   스물여섯 해를 키워준 한국을 뒤로하고 남편 따라 이민 길에 올랐던 1973년 7월, 그땐 인지하지 못했던 상황이 떠오른다.     미국 첫 관문인 하와이에서 서툰 영어로 입국 절차를 받으며 발생한 오류였다. 왜 박씨인 나를 노씨로 바꾸었나? 누가? 내게 한마디 묻지도 않고?  성을 바꾼다는 상태를 어찌 이리도 쉽게 당했단 말인가.     단순히 미국 땅에서 살기를 선택했으니 미국법을 따른 것이라고 변명도 없었다. 바보처럼 헤벌쭉 남편 성을 받아 불평 없이 살아온 것이다. 한국으로 보내던 편지마다 겉봉에 쓰인 노기제란 이름을 보시던 아빠의 허탈함이 느껴진다. 하나뿐인 딸을 시집보내며 절대 내 딸은 출가외인이란 생각을 안 하신 내 아버지. 박기제여라. 노기제가 웬 말인가.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본연의 박씨집 막내딸로 돌아가자. 헐거운 듯도, 빌려 입은 듯도 했던 남의 옷은 이제 벗어버리자. 친정아버님 생존해 계실 때, 이렇듯 크게 불효를 저질러 놓고도 아무런 자책 없이 무심히 살아온 날들을 돌리고 싶다. 나는 박기제다.     50여 년 결혼생활에 성씨까지 바꾸면서 최선을 다해 살아온 노기제에겐 아빠의 풍부한 사랑도, 끝 간 데 없는 오만가지 칭찬도, 믿고 지켜봐 주시는 기다림도 아낌 없이 보내 주시던 응원과 지지. 어느 것 하나 비슷한 대우가 없었다. 노씨 집안에서만 있었을 법한 바람직하지 못한 대우만이 내 삶을 얼룩지게 했고, 피폐하게 한, 이상한 나라의 생활 양상뿐이었다.   그런 인생 진즉에 접지 못한 내 탓이니 이제라도 내 친정으로 돌아가리라. 나는 분명 사랑으로 키워졌고, 귀하지 않은 대우 받으며 인생을 굴곡지게 살지 말았어야 했다.     박기제로, 남은 날들 살면서 하늘의 은혜 듬뿍 받아 환하게 그리고 예쁘게 피워보자. 다시는 내 친정 식구들 마음에 대못 박는 짓은 하지 말아야겠다. 박기제 / 수필가수필 친정 식구들 엄마 아빠 친정 밀양

2022-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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